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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본 한국시리즈, 승점 0.5점의 무게: 11회말 홈에서 끝난 한화와 LG의 230분 혈투카테고리 없음 2025. 6. 14. 22:54728x90반응형
서론: 1만 7천 관중이 숨죽인 대전의 밤, 왜 승자는 없었나
2025년 6월 14일,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는 단순한 야구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1만 7천 석을 가득 메운 관중의 함성과 긴장감으로 들끓는 거대한 콜로세움이었다. 이날의 경기는 단순한 정규시즌 한 경기가 아니었다. 리그 1위 LG 트윈스(40승 1무 26패)와 불과 0.5경기 차로 그 뒤를 바짝 쫓는 2위 한화 이글스(40승 27패)의 맞대결, 사실상의 전반기 선두 결정전이었다. 언론과 팬들은 이 경기를 주저 없이 '미리 보는 한국시리즈'라 칭했고, 그 무게감은 선수들의 어깨와 팬들의 심장을 짓눌렀다.
경기는 3시간 50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펼쳐진 처절한 '혈투(血鬪)'였다. 양 팀은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승리의 여신은 몇 번이고 양 팀의 벤치를 오가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연장 11회말, 마지막 아웃카운트가 기록된 순간 스코어보드에 새겨진 숫자는 2-2 무승부였다. 승리를 눈앞에 뒀던 한화 팬들에게는 통한의 결과였고, 패배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LG 팬들에게도 개운치 않은, 그야말로 '찝찝한' 결말이었다. 이토록 거대한 판 위에서, 승리가 양 팀의 손끝에 닿을 듯했던 수많은 순간 속에서, 어째서 승자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230분간의 기록을 복기해 본다.
1부: 에이스의 품격: 폰세의 10K와 임찬규의 무실점 역투
경기의 초반은 왜 이 경기가 '미리 보는 한국시리즈'라 불렸는지를 증명하는 명품 투수전으로 전개되었다. 양 팀의 선발 투수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마운드를 지배하며, 숨 막히는 0의 행진을 이어갔다.
1.1 한화의 괴물, 코디 폰세의 압도적 위력
한화 이글스의 1위 탈환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안고 마운드에 오른 코디 폰세는 그야말로 '괴물' 같은 투구를 선보였다. 그는 6이닝 동안 무려 10개의 탈삼진을 솎아내며 LG 트윈스의 강타선을 압도했다. 폰세의 공에는 상대 타자를 윽박지르는 '위력(威力)'이 있었고, LG 타자들의 방망이는 연신 허공을 갈랐다. 그의 압도적인 투구는 한화가 경기 후반까지 팽팽한 승부를 이어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완벽에 가까웠던 그의 투구에도 옥에 티는 존재했다. 5회초, 1사 2루 상황에서 던진 폭투 하나가 경기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빌미가 되었다. 이 폭투로 주자는 3루까지 진루했고, 결국 신민재의 희생플라이로 연결되며 이날 경기의 첫 실점이자 폰세의 유일한 실점으로 기록되었다. 단 하나의 실수가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에이스의 숙명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1.2 '한화 킬러' 임찬규, 대전 마운드를 지배하다
이에 맞선 LG 트윈스의 임찬규는 '한화 킬러'라는 명성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는 6이닝 동안 단 2개의 안타만을 허용하며 한화 타선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무실점 역투를 펼쳤다. 특히 1회말, 문현빈과 노시환에게 연속 안타를 맞으며 맞은 1사 2, 3루의 절체절명 위기에서 후속 타자들을 범타와 삼진으로 처리하며 실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지었다. 이는 단순한 호투가 아니었다. 적진의 심장부에서 상대의 가장 강력한 창을 막아낸, 베테랑의 관록이 돋보이는 위기관리 능력이었다. 최종 6이닝 89구 무실점이라는 기록은 압박감이 극에 달한 경기에서 에이스가 보여줘야 할 모든 것을 보여준 완벽한 투구였다.
두 에이스의 눈부신 호투는 경기를 팽팽한 투수전으로 만들었지만, 역설적으로 그들 자신에게는 승리를 안겨주지 못했다. 퀄리티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를 기록하며 제 몫을 다했지만 , 승패의 저울은 결국 불펜으로 넘어갔다. 이는 야구가 얼마나 팀 스포츠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시에, 압도적인 투구를 펼치는 선발을 언제 교체할 것인가 하는 감독의 고뇌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폰세와 임찬규가 마운드를 내려간 순간, 경기는 통제된 명품 결투에서 예측 불가능한 난타전의 서막을 열었다.
투수 팀 이닝 투구수 피안타 실점 자책 탈삼진 사사구 코디 폰세 (Cody Ponce) 한화 6.0 103 4 1 1 10 1 (1 HBP) 임찬규 (Im Chan-kyu) LG 6.0 89 2 0 0 3 2 (1 HBP) 2부: 요동치는 시소게임: 7회와 8회, 불펜에 갈린 승부의 추
선발 투수들이 내려간 마운드 위에서 경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7회와 8회, 단 두 번의 공수 교대 동안 경기의 흐름은 격랑에 휩싸인 배처럼 요동쳤다.
2.1 7회말, 한화의 역전: 장현식을 무너뜨린 안치홍의 적시타
LG 벤치는 1-0의 리드를 지키기 위해 불펜에서 장현식을 호출했다. 하지만 이 선택은 굳건해 보였던 경기에 첫 번째 균열을 만들었다. 한화 타선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사 후 최재훈의 안타와 대주자 이상혁의 도루로 득점권 기회를 만들었고, 타석에는 베테랑 안치홍이 들어섰다.
안치홍은 장현식의 공을 통타해 우측 담장을 직접 맞추는 큼지막한 2루타를 터뜨리며 2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스코어는 1-1 동점. 경기 내내 침묵하던 한화의 공격력이 폭발한 첫 번째 순간이었다. 기세가 오른 한화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된 1사 1, 3루 기회에서 황영묵이 과감한 기습 번트를 성공시키며 3루 주자를 홈으로 불러들였고, 마침내 2-1 역전에 성공했다. 대전구장은 팬들의 열광적인 함성으로 뒤덮였다. 독수리 군단이 마침내 경기의 주도권을 잡는 듯했다.
2.2 8회초, LG의 반격: 조기 투입된 김서현의 블론세이브
그러나 한화의 리드는 단 10분도 채 이어지지 못했다. 역전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인 8회초, 한화의 불펜이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마운드에 오른 한승혁과 김범수는 연이어 볼넷과 몸에 맞는 공을 내주며 제구 난조를 보였고, 순식간에 1사 만루의 위기를 자초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김경문 감독은 승부수를 던졌다. 마무리 투수 김서현을 8회에 조기 투입하는 강수를 둔 것이다. 하지만 이 도박은 실패로 돌아갔다. LG의 베테랑 포수 박동원은 김서현을 상대로 침착하게 중견수 희생플라이를 쳐냈고, 3루 주자가 홈을 밟으며 승부는 다시 2-2 원점으로 돌아갔다. 김서현에게는 뼈아픈 블론세이브가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7회와 8회에 걸친 공방은 양 팀의 현주소를 명확히 보여줬다. LG 불펜(장현식)이 먼저 흔들리며 역전의 빌미를 제공했지만, 한화 불펜은 그 리드를 지켜낼 힘이 없었다. 한화의 불펜 붕괴는 단순한 실점을 넘어, 마무리 투수를 조기에 소모하게 만드는 '연쇄 효과'를 낳았다. 이는 2위 한화가 1위로 올라서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가 불펜의 안정성임을 시사하는 대목이었다. 이 치열한 불펜 싸움은 경기를 다시 미궁 속으로 밀어 넣었다.
3부: 연장 혈투: 10회말의 병살타와 11회말의 보살
정규이닝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한 양 팀의 혈투는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한화에게는 두 번의 끝내기 기회가 찾아왔지만, 야구의 신은 번번이 그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3.1 10회말, 영웅의 기회 앞에서 침묵한 노시환
연장 10회말, 한화는 선두타자 이도윤의 2루타로 절호의 끝내기 기회를 잡았다. LG 벤치는 다음 타자 문현빈을 자동 고의4구로 거르며 1사 1, 2루를 만들었고, 승부는 한화의 4번 타자이자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 노시환에게 돌아갔다. 경기장 전체가 숨을 죽였다. 팀의 간판타자가 끝내기 안타를 터뜨리는, 야구에서 가장 극적인 시나리오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하지만 팬들의 기대는 차가운 현실과 마주했다. 노시환은 LG 투수 박명근의 공에 평범한 유격수 땅볼을 쳤고, 이는 6-4-3으로 이어지는 병살타가 되고 말았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 팀의 해결사가 침묵하면서 황금 같은 기회는 허무하게 날아갔다. 대전구장을 가득 메웠던 함성은 깊은 탄식으로 바뀌었다.
3.2 11회말, 승리를 훔친 송찬희의 레이저 송구
11회말, 경기는 마지막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화는 선두타자 김태연의 안타로 다시 희망의 불씨를 살렸지만, 이어진 이진영의 보내기 번트가 투수 앞 병살타로 연결되며 순식간에 2아웃, 주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경기는 이대로 무승부로 끝나는 듯했다.
그때, 이날의 비운의 영웅 안치홍이 다시 한번 빛났다. 그는 2사 후 좌익선상을 가르는 깨끗한 2루타를 터뜨리며 끝내기 주자로 우뚝 섰다. 그리고 다음 타자 이재원이 짧은 좌전 안타를 쳐냈다. 3루 주루 코치는 망설임 없이 팔을 돌렸고, 안치홍은 결승 득점을 위해 홈으로 전력 질주했다.
바로 그 순간, 경기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한 선수에게 집중되었다. 교체 투입되어 좌익수 수비를 보던 LG의 송찬희였다. 그는 타구를 잡자마자 지체 없이 홈을 향해 공을 뿌렸다. 공은 한 줄기 빛처럼 날아가 포수 박동원의 미트에 정확히 꽂혔고, 이를 '레이저 송구'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홈으로 쇄도하던 안치홍은 태그 아웃. 3시간 50분에 걸친 혈투의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10회와 11회, 두 번의 끝내기 기회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10회에는 팀의 최고 스타인 노시환이 해결사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면 11회에는 수비 강화를 위해 투입된 백업 선수 송찬희가 팀을 구하는 영웅이 되었다. 이는 야구의 각본 없는 드라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스타 플레이어의 화려한 홈런이 아닌, 이름 없는 조연의 완벽한 수비 하나가 '미리 보는 한국시리즈'의 결말을 결정지었다. 송찬희의 보살은 "오늘 밤, 두 팀 모두에게 승리는 없다"고 선언하는, 경기를 마무리 짓는 수비의 느낌표였다.
4부: 숫자로 본 명승부, 그리고 주인공들의 이야기
이 명승부는 몇 명의 주인공들이 만들어낸 서사시였다. 그들의 활약과 아쉬움을 숫자를 통해 다시 한번 되짚어 본다.
이닝 스코어 (LG-한화) 주요 상황 관련 자료 5회초 1-0 폰세의 폭투 후 신민재의 희생플라이로 LG 선취 득점.
7회말 1-1 장현식을 상대로 한 안치홍의 동점 적시 2루타.
7회말 1-2 황영묵의 기습 번트로 한화 역전 성공.
8회초 2-2 마무리 김서현을 상대로 박동원의 동점 희생플라이 (블론세이브).
10회말 2-2 1사 1, 2루 끝내기 기회에서 노시환 병살타.
11회말 2-2 경기 종료: 2사 2루에서 송찬희의 보살로 홈에서 아웃, 무승부 확정.
4.1 안치홍: 비운의 영웅
안치홍은 이날 한화 공격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7회 동점 적시타, 11회 끝내기 기회를 만든 2루타까지, 그의 방망이는 팀이 필요로 하는 순간마다 불을 뿜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홈플레이트에서 아웃되며 승리의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승리했다면 만장일치 MVP였을 그의 활약은, 무승부라는 결과 앞에서 '비운의 영웅'이라는 씁쓸한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4.2 송찬희: 무승부를 지켜낸 '신의 한 수'
이날 경기의 진정한 '게임 체인저'는 타자가 아닌 수비수였다. 송찬희의 마지막 송구는 단순한 호수비가 아니었다. 수비 강화를 위해 그를 투입한 벤치의 용병술이 완벽하게 들어맞은 '신의 한 수'였다. 그의 어깨 하나가 팀을 패배의 위기에서 구해냈고, 경기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완성했다.
4.3 폰세 & 임찬규: 보상받지 못한 에이스들
두 선발 투수는 챔피언십 레벨의 투구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두 사람이 합작한 12이닝 1실점이라는 기록은 그 자체로 경이롭다. 하지만 그들의 역투는 승리라는 보상을 받지 못했고, 나란히 '노 디시전'으로 물러났다. 이는 에이스의 역투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는 야구의 팀 스포츠적 특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4.4 장현식: 역전의 빌미를 제공한 흔들린 허리
LG 불펜의 '허리' 역할을 해야 했던 장현식은 이날 가장 먼저 무너진 투수였다. 그의 등판은 한화에게 역전의 기회를 열어준 촉매제가 되었다. 비록 팀은 패하지 않았지만, 그의 부진은 경기 후반의 모든 혼돈을 야기한 시발점이었다.
결론: 무승부라는 종착역, 1위 싸움의 새로운 서막
230분간의 전쟁은 결국 무승부라는 종착역에 다다랐다. 이 결과는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온 LG에게는 안도의 한숨을, 다 잡았던 승리를 놓친 한화에게는 통한의 아쉬움을 남겼다.
결과적으로 순위표의 0.5경기 차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 경기는 어느 팀이 더 우월한지를 증명하지 못했다. 대신, 양 팀의 라이벌리에 뜨거운 기름을 부었다. 숨 막히는 투수전, 예측 불허의 불펜 싸움, 영웅과 비운의 영웅이 교차한 마지막 순간까지, 이날의 경기는 2025시즌 KBO리그의 가장 치열한 우승 경쟁을 예고하는 거대한 서막이었다. 무승부는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 거인의 다음 충돌을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가장 강렬한 예고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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